꽃잎하나 받쳐 든 접견장 사랑이여

by 종화 posted Sep 08, 200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꽃잎하나 받쳐든 접견장 사랑이여




남들은 꽃잎따다 채갈피에 낀다지만
사나이 거친 손바닥에 꽃잎하나 얹고
달려가는 내 사랑이여
서른살의 성숙함으로
이 붉은꽃잎 하나만큼 꼭 그만큼만
그대 가슴에 새겨지고 싶은
생이별속에 자라는 뜨거운 내 사랑이여

작은 꽃잎 내보이며 징역사랑 물들일 때
습자지에 번져가는 잉크같은 전율이 있음에도
애써 눈물만 감추려는 서투른 그대 몸짓이
꽃잎하나 받쳐든 이 손마저 떨게하는  내
내 사랑이여
유리벽에 가린 아픔으로
벗겨진 살갗새로 스며드는 최루탄 물의 아림으로
마음은 이미 설움의 강을 이루고
돌아서는 발걸음에 붉은 꽃잎 뿌려지는
미칠 것같은 내 사랑이여

옛날처럼 손 한번 잡아보고 싶어라
단 한번 만이라도 코 한번 대보고 싶어라
일분일초만이라도 입술 한번 뜨겁게 대보고 싶어라
아 ---
피 끓는 사나이 연정이여
가두어 가두어 지친 사나운 늑대의 울부짖음을 배워가는
철창의 사랑이여

남들은 꽃잎따다 애인에게 준다지만
복수의 원한으로 씹어 삼킨 내 사랑이여
불끈 쥔 주먹에 짓 이겨지고 만 사랑의 꽃잎하나
이제는 피가되어 떨어지는
동토의 사랑이여

내가 쓴 시를 적어 보았다.이 시는 자신이 시를 써서 노래화한 유일한 노래이다.노랫말도 적을 생각이다.시와 노래가 어떻게 어울어지는가를 살피라는 뜻에서이다.자신이 쓴 시라 할지라도 이렇게 축소 되고 달라지는 것은 단순히 운율의 차이만은 아니다.
노랫말을 쓰는 사람은 시보다는 노랫말이 더 어려운 것같고 시 쓰는 사람은  노랫말을 쓰기가 난감한 것은 사실이다.각개의 문예가 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잘 만들어진 노래는 시가 요구하는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만으로의 독자성을 갖고 작곡가의 지향에 맞게 주체화한 노래이다.그런 이유로 자신이 쓴 시도 노래화 할 때는 독립된 구조를 다시 만들어야 하며 형상을 새롭게 고민 해야겠다.

남들은 꽃잎따다 애인에게 띄우지만
내가 딴 꽃 꽃잎 하나는 울고 있어라
유리벽에 가린 채로 우는 꽃잎은
미칠 것같은 그리움에 물들어가네
옛날처럼 손을 잡아 보고 싶어라
입술한번 뜨겁게 대 보고 싶어라
피 끓는 사나이 연정아
동토의 사랑아
가두어 지쳐버린 꽃잎하나는
불끈 쥔 주먹에 짓이겨지고
원한의 재로 떨어지는
동토의 사랑아
    *     *     *

어찌보면 난 연애다운 연애 한 번 못해보고 20대를 보내버린 반편이다.
제 혼자서 마음에 흑심이나 품고 있다가 잊어 버린다든가,끙끙 앓다가 술에 취해 자칫 실수나 하고 부끄러워 며칠씩 숨어 버리기나 했으니 말이다.철 없는 사랑의 나무에 매달리거나 가시 돋힌 사랑의 돌뿌리에 채여 품성적 고민으로 방황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도 내 삶의 일부였던 것을.

사실 따지고 보면 난 연애다운 연애 한 번 못해 본 역사의 피해자이다.
사랑이라는게 두 사람간의 적당한 교감으로 이루어 진다고 볼때 나도 사랑은 있었다.만나면 이별이라고 목숨 걸 틈조차 주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그 시절은 징역행 이별열차를 타 버렸던 때였다.하나로 부터 열을 배워가는 연애의 시작점에서 하루만 보지 못해도 보고 싶어지는 그 지점에서 하필이면 비운을 맞이했으니 서로의 사상감정이나 생활내용을 좁혀갈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고작해야 편지나 접견을 통해 연애의 올바른 길과 삶의 관계를 조금씩 이야기해 볼 뿐이었다.
출옥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될 것 같더니 터무니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갖은 정성으로 춥기만 한 징역에 불을 달구어주던 사람이었는데 함께 갈 자신이 없다는 말과 함께 사라져 갔다.
타협은 없었다.오기였을까.그것은 죽음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서로 시간을 두고 번민하고 설득하는 시간도 갖지 않았다.그런만큼 두 사람의 상처는 얼마나 컸겠는가.지금은 쉽게 글로 사랑을 애기 하지만 그 땐 차원이 달랐던게 사실이다.적당한 선에서 두 사람이 타협하고 조국을 잊지않고 적당하게 살아가는 인간으로는 어쨓든 싫었다.철 없던 시절이었을 땐 몰라도 올 때까지 다 온 스물 일곱 청춘은 적당한 삶을 완강히 거부했다.커져가는 투쟁과 깊어가는 동지적 의리가 정체된 나로 놔 두질 않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은 백배로 사람을 단련시키는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다.청춘을 빼앗기고도 기득권에 얽매인다는 것이 나쁘다고는 보지 않는다.오히려 장기적인 자신의 진로와 부합하여 합당하기까지 하다.하지만 사람은 제 각기 갈길이 있는 법,나의 갈길에서 그런 행위는 눈치보는 자유를 갈구하는 비겁의 소유자였다.연애도 마찬가지였다.
헤어짐은 공허만으로 남거나 상처로만 남지 않았다.끈질기게 건네주었던 편지를 통해 남겨진 노트분량 400여쪽에 달하는 올바른 연애관에 관한 정립을 남겨주고 갔다.

지금에 와서 헤아리고 보면 난,
연애다운 연애를 확실히 움켜 쥔 진짜 연애꾼이다.
내가 꼬마라고 부르는 여성과는 나이로 일곱살 차이가 난다.이 대목쯤 해서 독자는 '오메,이 도둑놈' 하고 절로 외칠지 모르겠다.그래도 좋다.여기선 듣기 좋은 욕이니까.
아저씨라 부르며 따라다니던 시절로부터 우리의 사랑얘기는 시작된다.워낙에 후배를 이뻐하고 감싸주는 내 탓도 있겠지만 6남1녀의 막내딸로 자란 꼬마는 남자들이 많은 가정에서 배운 허물없는 친근감을 보여 주었다.겉으로가 아닌 속에서 우러나오는 친근감임을 그의 맑은 눈으로부터 일치감치 눈치 챘던 것이다.차이많은 나이 탓도 탓이려니와 애당초 우린 연애의 대상이 아니었다.학교다니던 꼬마와 신변이 좋지 못해 사회 투신하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고개 숙이고 빈둥거리는 나와의 만남자체가 쉽지 않았다.어쩌다 학교에 들를 일이 있을 때 마주치면 웃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여느 관계나 다를 바가 없었다.그런 관계가 어떤 계기와 내용으로 뜨거운 열정을 쏟게 하였는지 궁금할게다.이 짧은 지면에서 길고 복잡한 목숨 건 한 판 승부의 고갯길을  다 말할 수 있을까! 토막으로 빚어 낸 얘기 속에서의 진실은 추상일 뿐일게다.훗날로 미루자.
가끔씩 마주치던 아저씨에게 애정을 느끼고 홀라당 넘어가는 지점에서 뭐하는 아저씨냐고 물을 때 졸업도 못하고 노래나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이후 꼬마는 내 노래를 많이 듣게 되었다.돈이 없어 싸디 싼 공테이프를 시장에서 사다 녹음했던 탓에 한 두번 들으면 쉽게 늘어나 버리는(그 때 그 테이프를 들었던 사람은 아직도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늘어나면 또 사고...) 첫 작품집은 꼬마 고생을 많이 시켰다.테이프를 열개씩이나 묶음으로 사서 들었댄다.나중에 안일이지만.
결론은 진짜 연애꾼은 나다.

수다는 이제 그만 떨고 노래로 묻혀 가야겠다.
광주교도소의 겨울은 북부지방의 징역추위에 못지 않다.몸을 못가눌 정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이한 건물구조(동굴처럼 되어있음)상 볓이 잘 들지 않는다.악명높은 광주교도소의 특별사동에 부는 스산한 바람은 쥐꼬리만한 햇살도 거부한다.거기다가 요란하게 불어대는 바람에 흙먼지라도 얹히는 추위란 것은 온도가 심하게 내려가서 오는 추위보다 훨씬 매섭다.
그런 날씨에도 어느날 난 운동시간에 한 모퉁이로 홀로 선 고운 민들레를 보게 된다.그놈의 동굴(특별사동)을 벗어나 따순 햇살이 드리워진 조그만 운동장에서 운동을 막 시작하려 할 때였다.남도의 천성적인 따스함 때문인지 겨울을 뚫고 한 귀퉁이에서 민들레는 때 아닌 자태를 뽑내고 있었다.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 잡혔다.어쩌면 별 의미도 없는 들꽃에 불과한 것인데도 소중하게만 느껴지는 감정이란 수인의 정서가 아니곤 감당키 힘들다.높은 담장에 부끄러우리 만치 낮게 드리워진 갖힌 민들레를 보면서 풀 한포기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그런 표현들이 관념적인 말장난이 아닌 진실된 시인의 절박한 조국사랑임을 절절히 알게되는 순간이었다.
조심스레 손을 모두어 꽃잎을 따다가 소중히 신문지 사이에 묻고 다시 책갈피에 끼워 두었다.

예정된 접견날짜는 넘었는데 꼬마는 오지 않는다.또 무슨 일이 터진 것은 아닐까!

예쁘게도 말라붙은 꽃잎을 받쳐들고 접견길을 간다.작지만 깊은 아저씨의 속뜻을 전하는 것은 그만 두더라도 단지 예쁜 꽃잎을 접으면서 꼬마를 생각 했다고만 전하더라도 받쳐든 꽃잎은 제 몫을 다한다.
혹자는 말한다 수인생활은 사람을 소심하게 만든다고. 그 말에 나는 반대한다.다 큰 인간이 작은 시간으로 마음이 커지고 작아질 일이 뭐 있단 말인가.사소한 일에도,무우쫑지 하나에도 피터지게 싸우고,한갖 작은 꽃잎에도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확인하고 지켜가는 갖힌 곳의 유일한 생존방식이다.무기이다.순결이다.그럼에도 소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수인의 정서를 아직 몸에 담지 못했으리라.징역 오래 살았다고만 정서를 깊게 승화했다고는 볼 수 없다.때론 하루를 살다 나와도 그안의 정서를 훌륭하게 수용하는 일꾼도 많다.
꽃잎은 그러한 수인의 정서를 반영항 채로 인사를 나눈다.접견장에서 몇 마디 건네기도 전에 눈망울을 글썽이는 데에야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애써 눈물을 감추려는 어색함은 갖힌 자의 한계를 더 더욱 느끼게 하는 초라함의 발판이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무엇하나 전해줄 리 없겠지만 그래도 꽃잎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받쳐 든 손만 떨게하고 ...
조용히 손을 내려버리고 만다.
짧은 접견시간을 안타까워 하며 돌아서는 발걸음은 지켜보고 있는 꼬마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다.다문입술로 굳게 쥐고 꿈틀거리는 손가락 사이로 부스러 내리는 민들레 꽃의 가루들을 꼬마는 모를게다.

만남이 5년의 고개를 넘다보니 어느덧 꼬마는 제법 활동가의 품격을 갖추고 섰다.물론 꼬마가 변한만큼 나도 변했다.어쩌면 둘이는 나이만큼이나 큰 정서적 차이를 좁혀낼 수 없울지도 모른다.하지만 우리에겐 믿음이 있다.제각기 자신이 하는 일에 목숨 걸 용기가 있다.그런 차이쯤은 쉽게 박찰 투쟁이 있는 사람으로 내게 다가온다.그래도 난 꼬마라는 표현으로 끌을 쓰고 시를 쓴다.다 큰 처녀를 일상에서 꼬마라고 부를 수 없지만 꼬마를 쓰고 말하고 노래한다.
꼬마가 성숙하면,
꼬마가 있는 나의 시도,글도,노래도 성숙하겠지.
규정지어진 단어가 아닌 자연스런 만남의 시작을 알리는 꼬마라는 이름도 다른 이름을 찾겠지.그렇다 해도 깊은 혁명의 한 점을 찍어 준 꼬마라는 두 글자는 영원한 채로 가슴에 남을게다.
풋풋한 사랑 그대로 남을게다.(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