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by 종화 posted Sep 0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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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
눈 쌓인 저 산만 보면
지금도 흐를 그 붉은 피 내가슴에 살아 솟는다
불덩이로 일어난 전사의 조국 사랑이
골깊은 허리에도 울부짖는 가슴에도 덧없이 흐르는 산아
저 산맥도 벌판도 굽이굽이 흘러
가슴깊이 스미는 사랑
나는 저 산만 보면 소리 들린다
헐벗은 저 산만 보면
지금도 들리는 빨치산 소리
내가슴에 살아 들린다

나는 저 길에 서면 분노가 인다
도청앞 금남로에 서면
지금도 짓밟는 군홧발 소리 불타는 적개심 인다
불덩이로 일어난 전사의 조국사랑이
치열했던 도청에도 비좁은 골목에도 덧없이 흐르는 길아
금남로도 광장도 굽이굽이 흘러
가슴깊이 스미는 사랑
나는 저 길에 서면 소리 들린다
금남로 한 벌판에 서면
지금도 들리는 칼빈총 소리
내 가슴에 살아 들린다

* * *

돌아보면 벅찬 감동이다.
늘 가슴속에 품어 온 어쩌면 한이 되어 남은 치욕의 역사를 되돌아 보는 기쁨으로 노래의 뒤안을 뒤척이고 있다.
술집이고,회의실이고,거리에서고 발걸음이 닫는 곳마다 빼 놓지 않고 열심히도 부르고 다녔던 대표적인 노래가 되어 참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고 있다.
우리시대 사람들이 80년 초반을 헤쳐 오면서 다 그랬겠지만 굴절의 역사를 거부하면서도 지리산 역사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어떤 것이 무서워서 그런 것 보다는 그 진실을 몰랐기 때문이다.감시도 통제도 많던 시절에 그 누구하나 지리산 역사와 빨치산을 얘기하고 가르쳐 준 적이 내 기억에는 없다.당연히 나도 몰랐던 것이고 지리산을 가도 깊은 감동으로 그 날을 헤집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저 그러려니 사상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으려니 하는 얇은 생각 뿐이었다.
베트남의 혁명역사 쿠바운동의 전개 과정 맑스와 헤겔의 철학 사상이나 정치사는 일찍부터 접했어도 우리 역사는 빨치산을 제외한 채로 나를 만나곤 했던 기억이다.그 때 당시만 해도 그에 관련한 책도 없었을 뿐더러 선배들로부터 듣지도 못했다.선배들의 얄팍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판 사회과학 도서를 통해 학습을 하던 당시에 합법적인 서점에 있는 책 정도에는 그런 투쟁의 역사가 있을리는 만무했다.

82년 가을에 나는 잊지 못할 친구이자 동지를 만났다.
제주도가 고향인 그는 둘도 없는 친구로 그 친분을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다.
80년 오월의 아픔과 일어섬의 과정에 내던져져 있던 세대층이라 정말로 술을 많이 마셨다.학습하는 시간이나 여타의 시간 보다는 술 좌석을 찾는 시간이 많았고,그 안에서 고민하는 양도 방황의 크기도 많고 컸다.제주도 친구에게 제주의 항쟁의 역사를 듣게된 시작도 구석진 대폿집이었다.간단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되는 그의 역사 속에 비추어 지는 가족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난 그날 엄청난 충격으로 나를 주체하지 못했다.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흩뿌리며 토로하던 그 친구 앞에서 굳어진 내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어떤 책에서도,선배들의 역사 논리 속에서도,듣고 보지 못한 숨겨진 조국의 역사를 한 친구의 가족사를 통해 듣게 된 것이다.그 때가 내가 처음 빨치산이라는 단어를 투쟁의 중심영역으로 두었을 때다.지금쯤이나 되니까 투쟁역량을 기반으로 빨치산이 재조명 되고 있지 그때는 한 마디로 우물에서 숭늉 찾기 정도로 귀하게 숨겨진 존재였다.
수 많은 제주양민이 학살되고 이십만이 되는 인구 중에 칠팔만명이 몰살 당했다는 이야기만으로 내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되고 말았다.그 날의 전율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하물며 제주도 민중의 제주항쟁과 어떤 형식으로든 연결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말에야 되새길 나위도 없었다.

나는 그 친구의 구체적인 역사의 한을 모른다.
아니 알고 있다고 한들 구차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는 한을 갖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실재 고아이든,어찌하여 고아거든,
아니면 아버지가 토벌대 교관이었든,
큰 어머니 남편이 빨치산 전사였든,
그가 양자로 입적을 한 큰 어머니가 누구이든,
원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무슨 이유로 호적을 팠든,
모른 채로,
아니 모른다.
어쨓든 그는 지금 홀홀 단신이신 큰 어머니의 양아들로서 함께 살고 있다.어여쁜 제주도 아가씨와 함께.

제주항쟁에 관해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전율로 달려 들었던 그 때의 심정을 십년도 넘게 지난 지금에서는 찾고 전하기도 힘들어 졌다.그 만큼 역사는 가깝게 우리 곁에 와 있다는 증거이리라.
그 날의 전율과 분노는 그 친구와 워낙에 가까워진 사이라서가 분명 아니었다.
왜! 그토록 험한 조국의 역사를 그날까지 나는 모르고 있었던가하는 자책감이 더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 때 당시는 학교에서 탈춤 동아리 활동을 정리하고 학회에서 마당극 대본을 자주 썼던 때였다. 학회 문화행사는 연출부터 기획까지 거의 내 차지가 되었다.(그 당시만 해도 대동문화는 마당극 외엔 구경하기 힘들 때다) 그래서 인지 역사에 대한 홍역을 치루고 난 뒤에 그것을 반드시 형상화 시켜야 겠다는 소명의식이 가슴에서 불꽃으로 타오르게 된다.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있는 빨치산 항쟁을 형상화 한다는 생각만 해도 그저 가슴부터 뛰고 반드시 하고 말겠다는 의지만 굳어갔다.
실천은 생각을 곧바로 뒤따르게 된다.
생각대로 완성하기엔 많은 조사와 답사가 필요했다 한 마디로 무에서 유를 내 와야 하는 것이었다.찢어지게 가난한 내 조건에서도 여러차례 제주도를 다녀가기도 하고 안간힘을 썼지만 밀려드는 투쟁사업과 밀어닥치는 조직사업에 대한 회의와 갈등은 그 문제의 걸림돌이 되어 실마리를 못잡게 했다.역사에 대한 연정으로 끝나고 말것인가 하는 자괴감을 가득 담아주고 마당극으로서의 제주항쟁은 내 곁을 훌쩍 떠나가 버리고 만다.

투쟁은 모든 것을 변화 시킨다던가!
마당극 대본 짜는 일에서 손을 놓을즘에 역사는 민중의 투쟁의 물결을 타고 급속도로 치솟아 올라 갔다.군대를 제대하고 난 후에는 3년을 썩은 탓인지 그야말로 이 땅이 해방공간의 전야 처럼 보였다.그 만큼 많이 변한 것이다.그 땐 이미 발치산의 항쟁역사는 마당극에서 양념정도로나 다룰 정도가 되어 있었다.
군 제대 후엔 문예사업에 일체 손을 뗐다.오직 조직사업과 투쟁사업으로 일관했으며 장기적 전망또한 그 안에서 해결하려 했다.

다시 빨치산을 만나게 된다.
88년 오월 투쟁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징역을 간다.그곳에서 장기수 어르신들의 얘기는 관심의 촛점이 되고 동지들간에 치열한 토론의 중점일 수 밖에 없었다.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역사적 자료나 소설적인 책들은 우리가 읽는 책중의 으뜸이었다.
드디어 때가 다시 온 것이다.이 때가 노래시작이라는 문예정치가 발생되는 지점이고 보면 지리산은 내게 있어 귀중한 예술적 재산이다.팍팍한 징역생활 속에서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정서가 풍부한 우리들의 생활 감정이 자꾸만 오그라드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메말랐던 예술의 대지에 물을 뿌리고자하는 결심을 했던 이유도 단순한 그 이유이다.과거에 해 보았던 마당극 대본도 아니고,자주 긁적이던 글 작업도 아니고 바로 노래를 통해서 말이다.몇 곡 되지 않던 민중가요의 텃밭은 내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덩달아 노래에 대한 예술적 욕구도 자연스럽게 타올랐다.보다 구체적인 내용의 노래는 왜 없을까하는 불만아닌 불만으로 스스로에게 묻곤했기 때문이다.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작업을 시작하려 했던 얘기를 사람들에게 할 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인용한다.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면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은 행복이다는 말도 한다.
젊은이에게는 누구에게나 한 가지 이상의 특질이 있다.다만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는 말도한다.나도 그런 마음 가짐으로 시작했으니까.

지리산을 만들면서 내 몸에 수백마리의 뚝니가 기어다니는 환상에 말려 들었고,움추리고 앉아서 얼어죽은 시체의 환영도 보았고,조국을 위해 몸바치는 방법의 각단짐이 무엇인가를 배워갔다.풀가지로 얽어 만든 신발속으로 스민 추위가 온몸에 파고드는 동상으로 시달렸고 철원에서 추위에 떨던 군대시절이 지리산 생활의 백분의 일도 못된다는 생각에 미칠 때면 스스로 몸서리 쳤다.얼굴형상도 남기지 못한 80년 오월 금남로의 시체들은 따스한 햇살이라도 받았던가.눈속에 묻힌 이름없는 영혼들은 동태에 비길만한 고깃덩어리에 불과 하단 말인가.등등의 생각은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분노를 온몸에 잉크 번지듯이 번져가게 했던 것이다.

더이상 어떤 이유도 없이,
나라는 주체를 지리산 한 복판에 던져 버렸다.나의 10년 한을 풀어 내는 시작점이었다.빨치산의 조국투쟁이 더이상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될 수 없다는 분노와 사랑으로 내달렸다.
노래 만드는 순간 마다에 제주도 친구도 함께 기억했다.
(김지하 시를 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