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만남

by 종화 posted Sep 0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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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만남




4년전 첫창작집을 내고 얼마되지 않아서이다.우연한 기회에 한양대를 가게 되었는데,거기서 나는 새로운 만남으로 축배를 들어야했다.그 때 만난 사람이 바로 민중가요 작곡가 윤민석이다.안경 낀 너머로 쳐다보이는 순박한 눈빛에 자그마한 체구가 막힘없는 친근감을 던져 주었다.한양대 노래패 출신이었던 그가 후배와의 만남의 시간을 갖는날에 내가 한양대를 가게 되었으니 실로 둘이는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었다.아주 오랜 동료나 친구들처럼 얼싸안고 기뻐했던 우리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투쟁하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육친적 동지애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서울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건지조차 고민해야 했던 촌놈이 그날 완전히 마음 턱 놓고 술을 마셔대고 말았다.그것이 그와의 첫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다.하는 일이 같을지라도 활동하는 장소와 공간들이 서로 다르다는 생활적 이유들을 핑게삼아 이 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음을 고백 해야겠다.내 잘못이 크다.
내가 여기서 그와의 큰 만남을 새로운 만남이라고 정의한 까닭은 나의 새로운 출발점에서 그를 만났기 때문이다.노래라고는 까막눈이던 내가 노래를 걸머지고 나선 그 지점이었기 때문이었다.꾸준히 음악실력을 다져왔던 그리고 훨씬 이전부터 창작작업을 다그쳐 온 그를 만났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다졌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그날의 첫 만남보다 훨씬 이전에 윤민석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그것은 그의 노래가 대중속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일게다.윤민석의 출연은 노래운동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폭풍이었다.민중가요의 협소한 내용적 영역에 대한 나의 불만도 일시에 가시게 한 작곡가중의 한사람이었다.전남대학교 오월투쟁위원회 활동을 하던 당시 주제가가 반미 출정가였다.그 땐 그 노래의 작곡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사실 노래에 관심없던 그 당시의 내게는 당연한 현상이었다.다만 기존의 식상한 노래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한 기분만이 그 노래가 주는 의미의 전부였다.이후 그를 알게 된 결정적인 노래를 만나게 된다.'애국의 길'이란 노래가 그 장본인이다.
늦게서야 노래를 만들어 보겠다고 나선 내게 어떤음악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다.일찍부터 고민해 가는 과정이 없었기에 더 더욱 절박한 것이었다.변혁사회에 대한 실천 논리나 지향만으로는 음악의 진로를 밝히는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실재 노래를 접하게 되니 연구해야 할 것도 많고,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것도 부지기수로 많았다.그런 전환기에서,다시 한 번 내가 하는 일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 계기를 던져 줄 정도의 큰 감동으로 다가온 노래가 이 노래이다.

식민지 조국의 품안에 태어나 이 땅에 발딛고 하루를 살아도
민족을 위해 이목숨 할일 있다면 미국놈 몰아 내는 그 것 이어라
아- 위대한 해방의 길에 이름없이 쓰러져 간 전사를 따라
나로 부터 일어나 투쟁하리라 반미구국투쟁 만세

찢겨진 내 조국의 아픔을 딛고 이제는 소리높여 노래 부르자
통일은 우리의 소원일 수 만은 없다 오로지 통일만이 살길이어라
이 몸 갈갈이 찢겨짐으로 갈라진 내 조국 하나된다면
자랑스럽게 나아가 부서지리라 조국통일투쟁 만세

우리의 후손들이 태어난 후에 전설처럼 우리를 이야기하리라
그 때는 찢겨 피묻은 깃발이 남아 해방의 강산위에 나부끼리라
아-오늘도 우리는 간다 선배들의 핏자욱 서린 이 길을
노래 부르며 서로를 일으키면서 애국의 한길을 간다

언제 부턴가 사람의 입에 오르 내리더니 '애국의 길'은 급속도로 번져갔다.이 노래의 출연은 내게도 더없는 기쁨이었다.하나하나 살펴보면 일반적인 가사라 생각될지 모르지만 청년들의 투쟁일상은 평범한 것일 수 밖에 없기에 오히려 이 가사는 훟륭한 생활적 대안이다.극도로 절제된 가사와 선율은 그저 잘 정돈 되었다고만 볼 수 없다.투쟁에 임하는 작곡가의 극도의 침착성을 한눈으로 느낄 수가 있다.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다 보면 작곡가의 하루 일상도 생생하게 그려진다.내가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라서 더욱 그런가 보다.작곡가의 사상적 근거와 순결한 애국심을 타인으로 하여금 발견할 수 있게한 이 노래는 투쟁하는 만인이 가야 할 길을 밝혀주는 훌륭한 노래로서 자리를 튼튼히 굳히고 말았다.선율과 조사의 접함점에서 계속해서 조사를 높은음에 배치시킨 미미한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전체구성에 물려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린다.그만큼 훌륭항 노래라는 것을 말해 준다.'애국의 길'을 첫 대면 할 때의 벅참은 전대협 진군가로 이어졌다.

일어섰다 우리 청년 학생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뭉치었다 우리 어깨를 걸고 전대협의 깃발아래
강철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는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아 아 전대협이여 우리의 자랑이여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그 한길로

'전대협진군가'의 시원한 선율은 백만학도의 가슴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가는 곳마다 울려 퍼지는 전대협 진군가는 백만학도의 얼굴이요,자랑이 되었다.그가 전대협에 갖는 뜨거운 믿음과 동지적 사랑의 깊이를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한 노래가 되었다.
특히 '조금만 더 쳐다오.시퍼렇게 날이 설 때가지'라는 가사의 구절은 노래의 맛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 부분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괜히 무슨 자기 학대자들처럼 보이지 않는가'하는 의문을 그 당시에 가졌을른지도 모른다.그 때도 나는 똑같은 말을 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다.그래 쳐봐라 백배로 돌려주리라는 의지를 그야말로 생동감있게 표현한 중심구절이다.싸우자,투쟁이다,단결이다 등의 가사가 전부일 것 같은 이런 단체의 주제가에도 이러한 독특한 가사가 등장함으로 인해 참신한 맛을 살려주는 예를 보여준 대표적인 노래구절이다.계속 치는 것 보다는 쳐 달라는 역어적 표현( 나는 노래의 역어법이라고 부른다.특히 선율을 보면 많다.)으로 인해 더욱 분노를 느끼게 하리라는 결과를 작곡가는 주의하였을 것이다.
그는 노동현장에도 가벼히 하지 않았다.노동자의 생활노래를 지속적으로 고민한 흔적은 노동단체 에서 일하려 애 썼던 모습에도 발견된다.그가 노동문예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서울에서 평양까지'를 내놓던 당시에 나는 징역에 있었다.책으로 나마 그 노래를 접하게 된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이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 가는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가
우리민족 우리네 땅 평양만 왜 못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에라도 신명나게 달려 볼란다

이 노래의 우수성은 다 차치 하고라도 실천적인 운전 노동자의 생활의 단면이 통일과 자연스럽게 결합 되었다는 점이다.가사에서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그 중에서도 택시요금 이 만원 이라는 부분은 가장 현실적인 택시노동자의 생활을 담은 중심구절이 된다.
이런 가사쯤은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것이라 혹자는 생각 할지도 모른다.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책상에 앉아 노래나 만들려는 사람에게는 극도로 어려운 노랫말이다.택시노동의 생활에 깊이 관여하거나,체현하지 못하고서는 내올 수 없는 극도로 어려운 노랫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택시노동자야 자연스럽게 미터기 계산해서 이만원 정도 나오니까 그런 가사쯤이야 누워서 떡먹기라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운전을 하지 않는 예술형상 주체의 눈에는 그런 생활이 눈에 잘 익지 않기 때문에 뛰어난 가사로 비칠 수 밖에 없다.
생활의 생동감은 바로 생활 주체의 곁에 있는 것이지 멀리 그리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도 배운다.이가사는 작곡가가 직접 쓰지 않았다.그렇지만 여기서는 그런 문제는 상관없다 훌륭한 가사를 쓸 줄만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볼 줄 아는 창작주체의 눈을 살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좋은 가사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그 어떤 작곡가도 작품으로서의 선율을 내 오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윤민석은 그런 주체의 눈을 가졌다.
노래로 보는 윤민석은 차분하다.함부로 달려들지도 않는다.한편으론  소극적인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나 내 눈엔 절제된 자기 생활을 보여준다.극도로 침착한 가사 구성에서도 그렇고,쉽게 노래를 만들어 발표하지 않는 모습에서도 그렇다.내가 갖지 못했던 예술축적을 갖고 있으면서 휘둘러 대는 창작의 칼은 시기 적절한 곳에 소수의 노래를 발표하여,여지없이 불리게 하는 직업적 차분함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지금,그의 노래를 평가하고자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데 엉뚱하게도 노래를 살펴보게 되었다.이쯤 해 두기로 하자.아니,어쩌면 이 곡들 밖에 모른다고 할 수 있다.그 만큼 이 세 곡이 내게 주는 의미가 다른 노래에 비해 훨씬 컸다는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한 시대를 실천해 가면서 뛰어난 예술형상으로 뭇사람의 허기진 예술의 배와 투쟁의 공간을 채워 준 그가 지금 국가보안법이라는 칼날에 유린되었다.사상의 자유가 없는 이 곳에서는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없듯이 그도 그가 해온 일만큼의 이유없는 댓가를 치뤄야 한다.내가 노래를 만들고 두 해의 징역을 살아야 했던 것처럼.
그는 결코 그 안에서의 굴종을 용납치 않을 것이다.그가 살아 온 삶과 예술은 단 한번도 타협앞에 무기력 한적이 없었으니 하는 말이다.또 무슨 무기를 갈아 가슴에 품고 나오게 될른지 우리는 기대해도 좋을 이유가 거기에 있다.80년대 청년학생 활동가로서의 탄탄한 삶을 살아 온 그가 겪는 고행의 길은 오히려 영광의 길이다.낙관적인 삶으로 하루의 투쟁에 충실해 온 노래꾼의 묶임은 우리 모두의 분노가 된다.
어쨓든 해 온 만큼 열심이기를 모두 함께 기원 해야겠다.관념의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이번 기회에 전해야겠다.수인생활이나 해서야 그를 더듬어 보는 시간도 오늘이 갖는 척박한 현실을 핑게로 늦은 동지적 인삿글을 마쳐야 할까보다.

또 한번의 새로운 만남을 기약 하면서...
                              (구국예술 9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