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보다 무서운 것은 중단이다

by 박종화 posted Sep 0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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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보다 무서운 것은 중단이다
             ----   실패보다 무서운 것은 중단이다 1




남들은 밖에서 일하고 돈벌지만 나는 지금 논다.
논다고 표현하니 놈팽이라고 말하는것 같아서 마음이 글에게 눈치를 준다.
내게 소원이 있다면 좋은 사회가 되어 적성에 맞는 직장에 다니면서 행복한 월급 한 번 받아보는 것이다. 주위의 모든 동료들이 직장에를 다니고 있으니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생각은 더욱 간절해 진다. 내가 돈벌 능력이 없거나 게을은 사람은 아닌데도 역시 논다. 그렇다고 뜨거운 노동의 기쁨도 움직이는 역동성도 없는 단조로운 생활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내일을 보장 못하는 때묻은 몇푼으로 하루를 버텨가지만 나는 논다.
버텨간다고 말하니 게을은 거지의 하룻밤이 그려지는 것 같아 처량하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자신과 용기를 갖는 지점이 있다면 버티고 싸워 이겨가는 나를 확인 하는 지점이다. 힘 없이 돌아서는 자가 많아 질 때면 그런 생각은 더욱 간절하게 근성으로 다가온다. 몇 푼으로 만들어진 인생의 대물림이거나, 요령있는 자의 생활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없는 곳에서 용기를 가져와야 하고, 오늘은 논다. 그렇다고 눈치보며 적당히 살아가는 그런 하루쯤으로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늙은 사람도 일하는데 젊은 놈이 논다.
늙은 엄니의 내일을 생각하면, 어쩌다 자식 찾아 와 건네는 손마디에서 파리하게 떠는 푸른지페를 생각하면 괴롭기도 하다. 누가 나에게 분노의 출발이 어디냐고 하면 엄니가 져야할 오늘의 업보에 있다고 말을 한다. 민.가.협 모임이 있으시다고 일옷이라도 차려입고 나가실 때를 보면,그런 생각이 꽉 차오르기도 한다. 이쯤해서 노는일 접고 진짜 돈되는 사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아직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머릿속 깊숙히 박혀 있을 뿐이다. 줄기차게 노는 것만 생각했다. 언제 그만 둘지는 모르지만 더 놀고싶다. 음악과 함께 쌀쌀한 돈푼과 함께!
남들에게 직업을 물으면 자신이 하는 일을 말하듯이 나는 노는 일이 직업이다. 논다고 표현하는 것은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지 나의 직업은 변할 수 없는 문예 활동가요, 작곡가요, 혁명사업을 다그치는 전사다. 남들은 하나씩 갖는 직업을 여러개나 가졌다. 그래도 나는 논다는 표현으로 글을 쓴다. 아직은 조국이 내게 월급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먼 훗날 한꺼번에 줄 모양이다. 노는 놈이 일하는 사람보다 더 악착같이 하루를 꾸려간다. 시작하는 일은 끝을 봐야하는 집념으로 노동의 피를 쏟아낸다. 동지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고민하고, 밤이면 글을쓰고,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고, 붓글씨도 하고, 그림도 치고 정신없이 바쁘게 논다. 그래서 내게 논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돈 없는 노래꾼으로 악기도 없는 방에서 놀지라도 행복하다.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바늘구멍만한 돌파구만 있어도 한 길을 지키면서 뚫고 가는것 외엔 다른 방법은 생각지도 않는다.

노는과정에서 피눈물로 얻은 교훈인데,
중단은 패배보다 무섭다.

실패보다 무서운 것은 중단이다.

              ---   실패보다 무서운것은 중단이다 2


조직 일상들이 낮시간을 강점하기에 일과가 끝나는 밤이면 나는 하루의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일과를 시작한다. 밤이 되면 바빠진다. 창작을 정리해야 하는 밤으로 바쁘다. 그 날 하루가 진실되지 못하거나, 무기력하면 밤에 쌓아 올리는 작품도 마찬가지가 되고말며, 육신은 잠못이룬 채로 뜬눈이다. 그렇다고 뜬눈이 헛시간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름대로 인내를 시험받는 계기가 된다. 그럴 때면 상상속에서 그려지는 허구예술(소위 순수예술이라 말하는)이라도 하고 싶은데 실재는 그러지 못하고 그저 뜬눈으로 바쁘다. 뜬눈으로 무기력한 밤의 연속일지라도 불현듯이 생활이 던져주는 강한 예술감동이 가슴으로 닥쳐올 때면 결코 여유와 방심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좋아하는 술 한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다. 작품의 전체구성이 끝나기 전에는 말이다.
줄기차게 밀어부치는 창작도 걸림돌은 있다. 애초부터 종자선택에 자기철학의 정치를 발생시켜 내지 못하면 막히거나, 어긋나게 된다. 그럴 때는 제쳐두고 다른 작품을 손대는 것이 현명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가 못하다. 자꾸 중단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뜬눈과 타협하게 되고, 적당한 값어치로 흥정 하려드는 패배주의의 침탈을 받고 만다. 이 것이 지속되면 자신의 무기력을 발견하게 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작품에 임하는자의 예술적 감동의 깊이는 얕아지고 만다.
더 좋은 작품으로 나가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면 어쨌든 완성품은 나오기에, 한 번 손을 댄 작품은 비록 잘못 선택한 종자라 할지라도 끝을 낸다. 그 만큼 고생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고생한만큼 대중에게 사랑받기를 원해야 하건만 실패의 원인이 이미 발견 되었기에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종자로써 최대치가 되도록 노력하며, 개인적으로 나마 작품의 성과를 추스리면 된다. 그러면 스스로 비판이 되고 다음 창작의 발판으로 삼게 된다. 작곡연습을 실재와 같은 조건에서 하는 하나의 방법도 된다.
처음부터 질높은 종자를 골랐을 때는 위와같은 고민은 당연히 없다. 쉴새 없이 몰아치는 순간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다. 행여나 좋은 종자를 놓칠새라 빠른듯 느리게 한올한올 선율을 풀어간다. 깊은 감명으로 다가온 삶의 진실을 작품으로 표현해 낼 때 중단하는 것은 높은 열정으로 잉태 될 좋은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간의 열정은 게으른 몸에서 빨리 달아나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노래라고 하는 것이 꼭 시간을 많이 걸려 만들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불현듯 다가온 내용에 대한 진실성과 자신의 열정이 작동하는 수준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다가드는 큰 감동에 걸맞지 않게 중단하게 되면 내일 다시 그 감동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를 않는다. 그러면 중단은 실패보다 큰 고통이다. -93년